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웨스 크레이븐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그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흔히 "[[호러영화]]의 거장"이라는 말을 달고 등장한다. 아무래도 [[호#s-3|호]]인 듯. 비슷한 호칭으로 불리는 다른 거물들과의 차이점은, 그와 함께 1970~80년대의 호러영화를 이끈 감독들은 거의 모두 활동의 맥이 끊기거나, 활동은 하지만 묻혔거나, 아니면 다른 장르로 [[피터 잭슨]]처럼 전업하거나 [[샘 레이미]]처럼 병행하게 되었는데 크레이븐은 1990~2000년대까지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고 2011년에도 신작을 발표했다. 즉 오직 한 우물만 팠다. 70세가 넘었는데도 호러 외길 인생이라니 좀 많이 무섭다. 한마디로 '''인생이 호러.''' '''호러물이라는 [[장인|한 우물만 파신 분.]]''' 1939년생으로 [[휘튼 칼리지]]에서 영문학과 심리학 학사를, [[존스 홉킨스 대학교]]에서 철학과 창작 석사 학위를 딴 인텔리 출신이다. 생전 여러 인터뷰에 따르면 독실한 침례회 원리주의자 집안이라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. 이는 아버지가 어릴적에 병으로 죽고 어머니는 더더욱 종교에 빠져들어 강요하면서 영화를 아예 금지하여 보질 못했다고 한다. [[프랑수아 트뤼포]] 등의 유럽 영화를 좋아했던 그는 졸업 후 대학 강사를 하면서 알바로 영화 편집 일을 하다가 뉴욕으로 이사가면서 강사 일을 그만두고 영화 쪽에 투신하게 된다. 택시 운전도 잠깐 했었다고한다. 결혼도 하여 두 아이를 가졌으나 아내는 대학 강사 그만두고 어렵게 영화 알바같은 일을 하는 그에게 실망해 1969년 이혼했다. 그러다가 숀 S. 커닝햄([[13일의 금요일 시리즈]] 1편 감독)이 감독한 [[포르노]] [[다큐멘터리]] "투게더"를 편집하게 되었는데, 투게더가 재미 좀 보자 영화사에서 5만 달러에 [[호러영화]] 한편 만들어보라고 제안한다. 커닝햄이 "야 우리가 직접 다 하면 4만으로 떡친다. 만 달러는 우리가 먹자"고 꼬셨는데 웨스 크레이븐은 그때까지도 호러영화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고 한다. 결국 반 재미삼아 각본 쓰고 감독한 영화가 1972년에 나온 《[[왼편 마지막 집]]》. 정작 만들다 보니 예산이 부족해서 4만은 커녕 9만 달러짜리 영화가 되었다. 유럽 영화 팬이라 그랬는지 [[잉마르 베리만]]의 영화 《처녀의 샘》을 베이스로 한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호러라 불릴만큼 요상하게 무심하고 리얼한 폭력씬을 보여주며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큰 화제가 되었다. 이어 1977년 "[[공포의 휴가길]]"(Hills Have Eyes)을 발표하는데, 휴가길을 떠난 가족이 [[네바다]] 사막에서 [[돌연변이]] 살인마에게 습격당하는 이 영화는 고전 [[컬트]] 영화의 반열에 올라 있으며, 2006년 [[리메이크]]되어 인기 시리즈가 되기도 했다. 리메이크의 국내 제목은 "힐즈 아이즈". 이 영화의 모티브는 [[스코틀랜드]]의 [[도시전설]]인 [[소니 빈]]이다. [[http://www.yuantv.com/bbs/board.php?bo_table=uu3000&wr_id=608|소니 빈의 전설]]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Swampthing.jpg]] 이렇게 잘 나가던 그는 1982년 만화 [[스왐프 씽]]을 영화화한 "늪지의 괴물"을 3백만 달러나 들여 야심차게 내놓지만, 흥행이 쫄딱 망하며 위기에 빠진다. 이 영화는 실험 용액을 뒤집어 써서 녹색 괴물이 된 과학자의 이야기로, [[헐크]]의 호러 버전 같은 영화. [[1981년]] 즈음, 웨스 크레이븐은 "꿈 속의 살인마가 현실의 사람을 죽인다. 잠들면 죽으니까 못 잔다"라는 괜찮은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. [[킬링필드]]에서 탈출해 미국에 건너왔으나 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죽은 [[캄보디아]] 인들에 대한 기사가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며 꿈 속에서 사람을 죽이는 프레디 크루거는 어릴적에 우연히 본 큰 화상을 입은 노숙자의 얼굴에 대한 기억으로 만들었다. 이 아이디어를 토대로 각본을 쓰고 있던 크레이븐은 "늪지의 괴물" 완성 후 곧바로 영화화를 타진하는데, [[월트 디즈니 컴퍼니]]에서 어린이를 위한 내용으로 순화시키면 제작해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단번에 거절했다.([[https://screenrant.com/nightmare-on-elm-street-disney-movie-version/|#]]) 결국 메이저 영화사를 잡지 못하고 영화 배급만 하던 중소회사인 [[뉴라인 시네마]]에서 독립 영화로 제작하게 된다. [[나이트메어 시리즈]]의 1편인 "[[나이트메어(1984)|나이트메어]]"는 110만 달러의 제작비로 미국에서만 26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었으며 역사상 가장 유명한 [[호러영화]] [[프랜차이즈]]로서 크레이븐의 명성을 확고하게 굳혔다. 제작사인 뉴라인 시네마는 나이트메어 시리즈로 먹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, "[[프레디 크루거|프레디]]가 세운 회사"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. 현재는 [[워너브라더스]]에 합병되었다. 이후 호러영화의 전성시대를 타고 1년에 1개 꼴로 빠르게 영화를 발표했으며, [[에디 머피]]가 [[뱀파이어]]로 나오는 "브룩클린의 뱀파이어" 같이 좀 그런 영화도 있지만 "공포의 계단", "영혼의 목걸이" 등 호러팬이라면 봐둘만한 작품도 많다. 80년대에는 TV 호러영화도 여럿 감독했는데 1986년 5월 28일 [[토요명화]]로 [[냉동인간]]이란 제목으로 더빙 방영한 Chiller(1985)도 그가 감독한 TV 영화이다. 1990년대 들어서면서 [[할리우드]] 호러영화가 틀에 찍은 듯한 졸작만 나오는 답보상태에 빠지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자 이에 대응하여 크레이븐은 1994년 산으로 가고 있는 기존 시리즈를 대놓고 무시하는 새 나이트메어 "뉴 나이트메어"를 만들어 시리즈를 정리해 완결시키고, 이어서 1996년에는 역사적인 영화 [[스크림(영화)|스크림]]을 내놓으면서 호러영화계에 새로운 한 획을 긋는다.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.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인지 스크림 시리즈는 이후 직접 감독을 담당하였으며,[* [[나이트메어 시리즈]]에서 웨스 크레이븐이 직접 손댄 것은 1편, 3편, 뉴 나이트메어 밖에 없다. 그나마도 3편은 공동 각본 및 공동 기획만 맡았다. 나이트메어 시리즈 중에서 가장 평가가 좋은 것도 크레이븐 감독이 직접 손을 댄 저 세 편이다. 전설이 된 1편은 말할 것도 없고, 3편 드림 워리어즈는 1편을 제외하면 가장 고평가를 받는다. 7편은 망조가 끼어가던 시리즈를 무난하게 마무리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.] 2011년에는 4편인 [[스크림 4G]]를 발표했다. 4편은 너무 늦게 개봉해서 약간 망하긴 했다. 스크림 시리즈를 찍으면서도 중간중간에 "커스드", "나이트 플라이트", "마이 소울 투 테이크" 등의 호러/스릴러 작품을 꾸준히 만들었으며, 자신의 옛날 영화인 "힐즈 아이즈", "왼편 마지막 집"의 리메이크 및 "위시마스터", "피스트", "브리드", "펄스" 등의 제작 또는 각본을 맡았다. 물론 다 호러영화. 정말 호러에 몸을 바친 분이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. 그가 손댄 작품 중 호러가 아닌 것은 음악을 소재로 한 휴먼 드라마인 [[메릴 스트립]] 주연의 "뮤직 오브 하트"(1999). 2006년 유명 감독들의 단편 모음 "파리, 사랑해"(Paris, Je T'Aime)에도 훈훈한 단편이 하나 있긴 한데, 배경이 공동묘지에 유령이 나온다(...) [[나이트 플라이트]](2005)도 호러라기보다는 정통 스릴러. 2015년 8월 30일(현지시간), [[로스엔젤레스]]의 자택에서 [[뇌종양]] 투병 중 [[향년]] 76세의 나이로 [[사망]]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